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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인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태도와는 다른 비여호와교에 대한 이슬람의 태도(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교이전 서양문명에 대한 태도보다 더욱 잔인하고 살벌한..)

 

정치적 분석과 역사적 편지를 통한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의 이슬람 시대의 역사

Islamic era histroy of Zoroastrians of Iran through political analysis and historical letters

 

 

  630년의 아랍 정복과 그 결과에 대해 단 한 번도 공정하게 조사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종교적 정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흔히 아랍인이 이슬람교를 이란에 가져왔고, 이란인들은 그들의 정부(사산 왕조)에 매우 불만족스러워했으며, (조로아스터교의)엄격한 종교적 규범은 일상 생활을 간섭했고 사산조의 폐쇄적 신분 제도는 이란인들이 기꺼이 이슬람의 평등과 형제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관점은 비단 역사적 증거와 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을 부정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새로운 교의와 전통을 신봉하기 위해 이전의 것을 쉽사리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원시 아랍인들도 그들의 원래 종교를 쉽게 버리지 않았고, 몇 번의 종교 전쟁에서 수많은 불신자들이 학살되었다. 아랍 정복은 신분 제도를 붕괴시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란인들은 자신들이 두 개의 새로운 신분, 노예와 ‘비아랍인 무슬림’(slaves and Mawali)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량의 이란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붙잡힌 남자들은 아랍 시장에서 팔려나갔고 심지어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들조차 자유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비아랍인 무슬림 혹은 해방된 노예라고 불렸고, 기본 인권을 거의 다 박탈당했으며, 말을 탈 수도 무기를 가질 수도 없었으며 가끔은 재산의 일부를 그냥 빼앗기기까지 하였다. 대량의 이란인의 노예화는 매우 유행하여 시아파가 이맘 알리의 가문을 사산 조와 연결시키기 위해 만든 이야기에서는, 심지어 샤 야즈데게르드의 딸 샤르바누조차도 메디나의 노예시장에서 이맘 알리에게 팔리는 처지가 된다. 알리는 그녀를 아들 후사인에게 주어 결혼하게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시아파는 이맘 후사인의 후손이 사산 조와 피로 연결되어있다고 믿는다.

 

  문화적 재난은 비참했다. 책들이 불타고, 학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학교와 도서관은 파괴되었다. 침략자들이 꾸란이야말로 마지막 책이고 따라서 다른 책들은 파기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란은 짧은 시간 내에 세계적 강국과 세계 과학의 중심이라는 자리에서 무식하고 뒤떨어진(illiterate and backward)나라로 추락하여 절대 자립할 수 없게 되었다. 몇 세기 뒤, 15세기에 사파비 왕조가 일어설 때까지 이란은 한 깃발 아래 통일된 나라가 되지도 못하였다.

 

  사파비 왕조의 조상인 ‘셰이흐 사피 아르드빌리’는 순니파 무슬림이었다. 왕조의 창시자 샤 이스마일은 국가를 통일하기 위해 시아파를 채택했고 그들을 독려하여 순니파인 오스만 튀르크와 싸우게 했다. 이 정책은 동쪽에서 오스만 튀르크의 위협에 맞닥뜨린 유럽 강대국들의 환영을 받았다. 튀르크인들은 유럽을 침략하여 동부를 이슬람화하고 있었다;the goal was to keep them engaged in the south. 그러나 이란인들의 개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다수는 순니파였고, 4백만 정도는 옛 종교를 믿었고 조로아스터교도로 남아있었다. 또 다른 문제는 대중을 가르칠 시아파 성직자의 부재(不在)였다. 게다가 여전히 존재하는 거대한 조로아스터교 구역(existing large Zoroastrian sector)은 옛날 종교로의 회귀에 대한 우려(concern)를 늘렸다.

 

  성직자의 부족은 레바논과 바흐라인 같은 다른 지역에서 데려오는 걸로 해결했다. 수니파 다수를 시아파로 개종시키는 것은 폭력과 학살로 이루어졌다. 혼란 중에 많은 조로아스터교도들이 목숨을 잃었고, 회귀(조로아스터교로의)의 위협을 근절하기 위하여 많은 무자비한 행동이 실행되었다.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는 성서의 소지자로 여겨졌는데, 모세와 예수가 꾸란에 언급되었고 여러 수라(several Suras)가 그들을 명기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라투슈트라는 언급되지 않았다. 비록 이 시기에 비무슬림들이 점잖은 대우를 받지는 않았지만, 조로아스터교도들만큼 큰 타격을 받은 공동체나 종교는 없었다. 가족의 한 구성원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그는 모든 유산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법이 제정되었다. 종교세나 지즈야가 부과되었고 지불할 수 없는 자는 고문을 당하거나 죽거나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개종을 해야 했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은 또한 자신들이 모욕과 박해의 대상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 노란 천조각을 몸에 걸쳐 구별되게 해야 했다. 그들은 가브레(Gabre or Gavre)라고 경멸받았는데, 이는 대중들의 마음 속에서 신앙 없는 자와 동일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로아스터교도 게토(Zoroastrian ghettos)는 가브레스탄(Gavrestan)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페르시아어로 ‘공동묘지’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무슬림 성직자들은 특히 적극적으로 조로아스터교도에 대한 증오를 선동했고 이는 더욱 많은 박해와 심지어 학살을 유발했다.

 

 

사파비 샤 압바스 시절의 이란의 조로아스터교의 상황

 

  샤 압바스 시절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의 수난은 특히 심했다. 동방과 팔라비 철학(The eastern and Pahlavi philosophy)이 부활하였고 추진력을 얻었다. 그는 이 운동을 뿌리째 뽑아버리기로 결심했다. 아자미요운이라 불렸고, 아랍 시대는 끝났으며 새로운 페르시아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 믿었던 ‘다르비슈 마무드 파시하니’의 추종자들이 학살되었다. 샤 압바스가 친히 그들의 지도자 몇 명을 처형했다. 팔라비 철학과 옛 종교로의 회귀에 대한 그의 심각한 우려는 그로 하여금 가혹한 반()조로아스터교 정책을 추진하게 했다. In a letter dated Bahman Rooz, Ardibehesht Mah, 1 005 Yazdgardi (1015 Hijri), 야즈드의 샤리파바드의 자르투슈티스(the Zarthushtis of Sharifabad, Yazd)가 인도의 파르시교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여있다.

 “야즈드게르드 977(히즈라 987, 서기 1608)에 샤 압바스의 대리인이 야즈드에 와서 우리 종교의 책을 몰수하려 했소. 그들은 책을 넘겨주기를 거부했던 두 성직자(Mobed,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를 죽였소. 투르카바드에서는 책을 넘겨주기를 거부했던 많은 성직자들이 죽음을 당했소. 샤의 대리인은 노략질을 했고 이곳의 많은 경전을 훼손하였소.

자비 베투즈 교수(professor Zabih Behtooz)는 이렇게 썼다.

 “샤 압바스는 많은 지식인들과 조로아스터교도들을(intellectuals and Zoroastrians) 무신론자라는 구실로 처단했다.

 

  히즈라 1006년에, 샤 압바스는 마잔다란의 카스피안 지역(the Caspian province of Mazandaran)으로 군대를 급파하여 그곳 주민들을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 이 당시 그곳은 비단 조로아스터교를 믿기만 할 뿐 아니라, 파도우스파니안(Padouspanian)이라는 조로아스터교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의 명령에 의해 많은 조로아스터교도들이 강제로 추방되어 이스파한 근처의 ‘가르가바드’라고 불리는 게토 마을에 정착했다. 그 이주 동안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농장과 사업에서 분리되었고 어떠한 일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을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천한 일에 종사시키기 위해 그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한 로마인 여행자 피에트로 델라 발레(Pietro Della Valle) 1617 12 8일에 이런 편지를 썼다:

 “가르가바드의 도로는 넓고 잘 만들어졌지만 집들은 고작 한 층이고 작다. 그곳 주민들의 가난을 반영한다.

그는 덧붙이길,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사업(business)을 가질 수 없고 대부분 노동자나 농부이다. 그들의 옷은 진흙 벽돌의 색으로 가득하다(thick with the color of mud brick). 샤 압바스가 아르메니아인들을 타브리즈의 줄파(Julfa)에서 이동시켜 이스파한 근처의 줄파에 정착시켰다는 것도 언급해야겠다. 델라 바네(Della Vane)는 줄파에 대해 이렇게 썼다.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상인이고 부유하며 호의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 프랑스 여행가인 장 샤르딩(Jean Chardin, 1643-1713)은 이렇게 썼다.: 가브레와 파르시교도(Gabres and Parsis)는 거의 남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옛 전통과 종교를 고수했던 본래의(original) 이란인들이다. 이스파한 남쪽의 그들의 집과 마을 대부분은 무슬림들에게 파괴되었고 내전을 겪으면서 극소수만이 야즈드와 케르만에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어찌나 비참한지 솔레이만 3세 왕의 대관식 행사에 선물을 마련할 수 없어서 처형되었다.

 

 

시아파 성직자들의 역할

 

  옛 종교로의 회귀를 막기 위해, 시아파 성직자들은 강한 역할을 발휘했다. 그들의 저술은 조로아스터교도들에 대한 증오를 조장했다. 특히 그들을 더욱 효과적이고 긍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이 꾸며낸 문서들은 대부분 신성한 이맘들에게 바쳐졌다. 몇 가지 예가 아래에 있다.

 

1.마주시스(Majussis, 마기교도 혹은 조로아스터교도)들에게는 불에 타버린 잔드와 파잔드(Jand and Pajand)라는 이름의 책이 있다. 그들에게는 죽음을 당한 자라투슈트라라는 이름의 예언자가 있다. He had a book written on 12000 hides. 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무슬림 여인과 부정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기 전까지, 그들을 향한 지하드는 종교적 의무이다.

 

(셰이흐 바하이, 샤 압바스 시대의 대성직자이며 학자). 이 저작물은 21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

 

2.자라투슈트라라는 이름의 작자는 마주시스들에게 한 책을 가져다 주었고 예언자임을 주장했다. 몇몇은 그를 믿었으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고 그를 외면했다. 그는 살해되었고 사막의 들짐승에게 먹혔다. 원시 아랍인들이 자라투슈트라의 추종자들보다 하나님에 가까웠다. 왜냐하면...(중략)...그리고 그들의 왕 카이호스로는 삼백 명의 예언자를 죽였다.

 

(20세기 이란 시아파 성직자이며 이슬람 학자인 라이샤리)

 

3.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창시자이며 이란인들의 자신들의 고대 뿌리로 회귀하는 것을 매우 우려했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도 이렇게 썼다.

“마술사 자라투슈트라와 불 숭배자들은 부도덕한 악당들에게 신성한 신 숭배자라고 불렸다. 만약 파르스의 신전에서 타오르는 이 쓰레기 같은 불이 꺼지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저 허튼 소리가 퍼지고 그들은 모든 사람을 가브레의 교의로 불러들일 것이다.

 

  이러한 적대적인 환경에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영성으로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고통받았으며,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살아남아야 했다. 17세기에 한 프랑스 성직자가 상관에게 보낸 편지가 여기 요약되어있다.

 

“이슬람교는 이란인들의 유일한 종교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옛 종교를 보존한 많은 이란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 전래의 지식과 과학(ancestral knowledge and science)이 없습니다. 그들은 노예 신세와 절대적인 비참함 속에서 삽니다(live in state of slavery and absolute misery). 가장 어렵고 가혹한 공공 사업이 그들에게 할당됩니다. 그들은 대부분 짐꾼 아니면 농부입니다. 노예 상태가 그들로 하여금 겁 많고, 단순하고, 거칠게 만들었습니다(caused them to be shy, naïve and rough mannered). 그들은 다른 사투리로 말하고 자신들의 옛 문자로 씁니다. 이란인들은 그들을 가브레라고 부르는데, 우상 숭배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습니다. 그들은 불 숭배자라고 비난받습니다…그러나 그들은 불을 존중할 뿐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땅을 경작하고 과수원을 개발하고, 물을 더럽히지 않고 불을 내려놓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가장 신성한 사람은 자라투슈트라이고 그들의 가장 중요한 축제는 노루즈입니다…”

 

 

최악의 타격

 

  이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18세기로의 전환기에 조로아스터교도의 인구는 거의 백만에 달했다. 그러나 최악의 타격은 마지막 사파비 왕, 성직자에게 영향을 강하게 받아 광신자이며 미신에 사로잡힌, 샤 술탄 호세인이 가져왔다. 즉위 얼마 뒤에, 그는 모든 조로아스터교도는 즉시 이슬람으로 개종해야 하며 거부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칙령을 반포했다. 거의 대부분이 학살되거나 강제적으로 개종되었으며, 극소수만이 학살에서 탈출하여 야즈드와 케르만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추정에 따르면, 8만 명의 조로아스터교도가 목숨을 잃었고, 이스파한의 가브라바드의 모든 인구가 살해되었다. 오늘날 이스파한 근처의 나인과 아나르의 사람들은 다리어(오직 조로아스터교도들만 사용하던 언어)로 말하지만, 무슬림이다.

 

  단지 사파비 왕조 시대의 조로아스터교도 대량 학살의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중앙 이란의 공동체들의 인구통계학 묘사(demographic picture)가 있다. 오늘날 이스파한과 카샨 두 중심 도시는 강한 유대인 공동체가 있고 이스파한의 줄파(Julfa)는 아르메니아인 교회와 학교가 있는 아르메니아인만 사는 마을이다. 그러나 이 도시들에 토착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는 찾아볼 수 없다. 이스파한의 오래되지 않은 공동체들은 사실은 다른 곳에서 이주해 온 것이다.

 

 

그 후의 시기의 회귀에 대한 공포

 

  회귀 우려와 시아파 성직자들의 저술은 악의에 가득 찬 세대를 만들어내었다. 그들은 조로아스터교도를 불 숭배자라고 경멸했고 그들이 불결하고 쫓겨나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적대적 정서는 사파비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중단되지 않았고 비참함과 대량 학살은 계속되었다. 유럽인 방문자의 보고서가 이 사실을 반영한다.

 

  커 포터(Ker Porter) 1818 3 20일에 이런 편지를 썼다:

“많은 조로아스터교도들은 비참하고 절망적이지만 자신들의 종교를 고수한다. 다른 나라로 달아날 돈이 없기 때문에, 고향에서 학대를 당하고 견딘다. 그들의 영은 하늘 위로 오르고 그들의 눈은 땅을 바라보며 그들이 직면하는 일상적인 괴로움에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야즈드와 케르만을 피난처로 사용해왔다. 자신들의 전통을 실천할 수 있는 야즈드에 4천에서 5천명 정도의 조로아스터교도가 살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착한 부채 부치는 사람, 정원사, 장인이다.

 

  호우툼 신들러 장군(general Houtum Schindler)은 조로아스터교도의 곤경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슬람으로의 강제 개종, 재산과 유산 몰수, 무슬림 성직자에 의한 자산이나 사업의 오분의 일 강탈, 새 건물을 짓거나 옛 건물을 고치는 것 금지, 새 옷을 입거나 말 타는 것 금지, 추가의 세금(지즈야) 강제 납부, 가해자가 무슬림이고 피해자가 조로아스터교도일 경우 살인죄를 저질렀든 집에 침입하여 강도질을 했든지 간에 무죄.

 

  1850년대에 주이란 프랑스 대사였던 고비나우 백작(count de Gobineau)은 조로아스터교 공동체에 비관적인 전망을 했다. 그는 썼다:

 “오직 7천명만이 남았고 기적만이 그들을 절멸에서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영광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에 가르쳐준다. 이들이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이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마네크지의 역사적 편지:

인도의 파르시 교도들의 사절(the emissary of the Parsis of India) 마네크지 림지 하타리아(Maneckji Limji Hataria)의 유명한 편지를 빼놓고는 역사적 편지들의 목록이 완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란에 1년 거주한 뒤인 1855년에, 그는 이란의 조로아스터교 공동체에 대한 보고서를 파르시교 위원회(Parsi Panchayet)에 제출했다.

 

Dear Sir:

이 고귀한 집단은 잔인하고 사악한 사람들의 손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식이나 과학은 전혀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두 똑같습니다. 그들의 장정들은 건설현장에서 강제적으로 비천한 일을 하고, 노예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런 봉급도 받지 못합니다. As some evil and immoral men have been looking after their women and daughters, this sector of the community stays in door during the daytime. 가난에도 불구하고, , 공터, 목초지, 유산과 종교를 구실로 한 중세가 부과됩니다. 그 지역 군주들은 그들을 가혹하게 다루고 소유물을 노략질합니다. 자신들을 위해 비천한 건설 일을 하도록 강요합니다. Vagrants have kidnapped their women and daughters, worse than all the community is disunited.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미래의 구세주(샤 바람 바르자반드, Shah Bahram Varjavand)가 오는 것입니다. 극도의 괴로움 때문에, 구세주에 대한 믿음은 매우 강해서 35년 전에 한 점성가가 구세주의 탄생을 예언하자, many men in his search left the town and were lost in the desert and never returned.

아마도 마네크지의 다음과 같은 말이 공동체의 딱한 상황을 요약할 것이다.

 “나는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지칠 대로 지쳤고, 수없이 짓밟히는 것을 보았다. 세상 어떤 사람도 그들보다 더 비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사파비 왕조가 이란을 통일했지만 이란인들은 크나큰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이란인들의 강압적인 시아파로의 개종과 회귀에 대한 우려는 수많은 대량 학살을 초래했다. 그들은 성직자와 종교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고 전제적 통치를 계속했다. 그들이 입힌 피해는 우리 시대에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 이 동안에(in the course of events) 어떠한 공동체나 종교도 조로아스터교도만큼 고통받지 않았다. 우리 역사책이 중앙 이란에서의 무시무시한 조로아스터교도 대량 학살과 마잔다란에서의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개종에 대해 완전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경우 평화로운 자발적 개종이라는 왜곡된 서술이 일반적으로 퍼져있다. 회귀에 대한 정서는 심지어 오늘날에도 보편화되어있다, as there is generally less sensitivity toward conversion than reversion.

 

  다스투르 프람로제 보데의 말로 끝내는 게 적당할 듯하다:

 “많은 국가와 종교가 고대 역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가혹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조로아스터교가 어째서 살아남아왔는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This document written by Dr. Jahanian based on a presentation he made at the 7th World Zoroastrian Congress held in Houston, Texas in Dec. 2000 was posted on vohuman.org on February 5, 2005.

 

출처 http://www.vohuman.org/Article/Islamic%20era%20histroy%20of%20Zoroastrians%20of%20Ira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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