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등 유교조선의 불교 탄압        서기1400~서기1600  2026. 3. 14.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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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원각사
-절을 기생방으로 만들고, 비구니를 기생으로 삼아라
유생들과 왕들은 그들의 왕이자 조상인 태조가 세우고 보호했던 원각사조차 가만두지 않았다. 연산군은 원각사에 불상 대신 공자의 신위를 두게 하고, 심지어 장악원을 옮겨 기생 1천 2백 명과 악사 1천 명, 감독하는 사람 40명을 두어 자신의 기생방인 ‘연방원’으로 만들었다. 또한 정업원의 여승들과 전국 여러 사찰에서 수행 중인 여승들 중에서도 많은 수를 선발하여 기생 노릇을 하도록 했다.

-절의 기와와 돌을 가져다 백성들이 사용하게 하라
“불교는 음란한 음악이나 아름다운 여색과 같아.” 유생들이 경계했던 것은 갖은 부역으로 사찰과 승려를 괴롭히지만 출가하는 백성의 수가 불어난다는 것이었다. 유생들은 백성들이 사찰과 승려에 대해 보이는 경외심을 없애고자, 부역에 시달리다 도망간 승려에 의해 버려진 사찰의 불기들을 훼손하도록 부추겼다.

②회암사
-공신의 아내/딸/며느리라도 무조건 태형으로 다스려라
“고 참의 송흥의 아내 정씨, 참의 김상직의 아내 이씨, 고 호군 송면의 아내 신씨와 부녀와 여자 중 합하여 20여 명에게는 각각 장(杖) 80에 처하여, 모두 절개를 지키지 못했음을 책하고, 강주 혜회는 장 70, 무애희를 지은 원각/신주/신현 등은 각각 태형(笞刑) 50, 이대종/박동미는 각각 형장 80, 천인(賤人)의 여자는 각각 태형 50에 처하되……”.

사찰에 대해 여성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했으나, 유생들은 공부 장소나 유희 장소로 곧잘 이용하면서 승려들에게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짚신은 닳아 돌부리에 걸린 발은 피가 터지고,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턴 담뱃대 탓에 머리가 터지다
사찰에 부과된 주된 부역보다 유생 모시기에 더 시달려야 하는 사찰도 있었다. 전남 백양사(505P)와 경북 봉화군 청량산 청량사에서 있었다는 주세붕 일행의 일화(〈청양지〉).

-절에 조상의 묘를 세우라
1800년을 전후로 경향 각지의 유서 깊은 사찰들 중 지역 토호나 세도가들의 조상 묘지로 쓰기 위해 사찰을 파괴하는 일은 빈번했다. 광주의 유학 이응준이 회암사의 부도와 비석을 파괴하고 그곳에 죽은 아버지를 묻었는데, 사찰을 유생들의 조상 묘로 이용했던 것은 ‘선종과 교종이 소속된 사찰에서 5리 안’에는 무덤을 짓지 못하도록 금지하여 유생들의 끈질긴 논란(1554년 9월 3일 기사와 1556년 9월 4일의 기사)이 있었던 후 200여 년간 허다한 일이다.

③범어사와 불갑사
-부역을 감당할 수 없다면 절이라도 바쳐라
조선 후기가 되면서 사찰에 부과되는 부역의 양상은 훨씬 야비해진다. 탁발이 금지된 상황에서 사찰의 땅이 유생과 근방의 백성에게 강탈당해 굶주리게 된 승려들이 사찰을 버리거나 환속하도록 종용하였다. 범어사 초입에 세워져 있는 ‘조엄 감사 송덕비’의 내력과 영광 모악산의 불갑사에 전해지는 설두스님의 일화와 전승동요. 현감이 일부러 백지 고지서를 보내고 얼마 후 주지에게 고지서의 내력을 보고하게 하여 터무니없는 부역을 지게 하거나, 부역을 지지 못할 때에는 곤장을 때려 사찰을 떠나도록 종용한다. 유생들이 이렇게 사찰의 땅을 탐했던 것은 풍수지리설의 유행과 관련 있다.

④봉림사
-임금이 없기는 서학과 한통속이라
유학자 이경명과 채재공은 서학(천주교)에 대해 군신 부자 사이의 윤리나 남녀 부부 사이의 분별이 없어 그것이 불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상소한다. 신라 말기 봉림산파로 독립하여 선종의 요람 역할을 하였던 봉림사는 1800년 전후 다시 세워지면서 유생들의 불교 탄압에 휩쓸린다. 이것은 막 천주교가 유생들의 위기의식을 조장하던 때와 맞물려 있다. 지금도 봉림사와 그 주위의 땅은 이언적의 후손이자 밀양의 세도가였던 이씨 문중에 귀속되어 있다.

⑤단속사
-앞뒤도 모르는 무식한 중놈들
“일찍이 단속사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휴정이 <삼가귀감(三家龜監)>을 찬술하면서 유가를 마지막에 두어 간행하고 또 불상을 조성하여 사천왕이라고 일컬었으니, 형상이 매우 괴이하였다. 공은 그 책의 차례가 맞지 않은 데 분개하여 승려들에게 명하여 그 책판을 불사르고, 불상을 헐도록 하였다[안정복의 <順庵先生文集> 卷21]”

남명선생의 제자였으며 덕천서원의 중건과 수우당 최영경의 배향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진주 유생 성여신이 불교가 유교를 능멸하였다 하여 불경을 간행하는 데 사용되는 목판을 불태워 없애도록 하였다. 그의 요구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사천왕상을 파괴하라고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놀고먹는(?) 중들을 부려라 - 승려 개인에게 가해진 탄압
승려 개인에게 부과된 부역들 중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자주 언급된 것을 위주로 하여 탄압을 증언한다. 하나의 사찰에 부과된 부역의 종류는 백여 가지를 넘었는데, 이것들을 감당해야 하는 승려들에게는 백성의 부역을 대신할 나름의 부역이 따로 부과되었다. 무엇보다 산성이나 왕릉, 궁궐을 짓는 공사에 동원되는 것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승려들은 공사에 동원된 일반 백성이 받을 수 있었던 삯조차 받을 수 없었으며, 빌어먹거나 대개는 굶어야 했고 급기야 고통을 참지 못해 도망하였다. 결국 정부는 포나 돈으로 부역을 대신하게 하는 번전을 만들지만, 사찰 소유의 토지나 기물조차 유생들이나 근동의 사람들에게 빼앗겨버린 승려들은 그것조차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자 고향의 부모나 친지에게 죄를 물리는 연좌까지 등장한다.

①부역
-일할 중이 남지 않았다니, 절과 중을 유지할 방법을 찾아라
승려는 백성을 대신하여 부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런 부역 중에서 1670년 현종 대부터 1790년대 종조 대의 기록까지 120여 년을 걸쳐 언급되는 종이 부역이 손꼽을 만하다.

종이 만드는 일은 시간이나 손이 많이 드는 일로, 전남 순창군의 사찰에는 종이 7천 속(束)이 부과되었는데 1 속(束)이 10장이므로 7만장이라는 종이를 받쳐야 했던 일도 있었다. 게다가 종이 부역으로 인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는 군현에 단 한명의 승려도 남지 않은 사찰이 속출하여, 비변사에서는 “승려를 머물러 살게 할 대책과 사찰을 소생시킬 방도”를 찾는 어이없는 보고를 올릴 정도였다.

종이의 주원료인 닥나무를 기르던 사찰들을 경판을 만든다는 이유로 불태워버려 일반 백성에게 닥나무를 심도록 권장하여 부역을 면하게 하는 일조차 벌어졌다.

②승군
-중 입에 들어가는 곡식조차 아까워
고구려 때부터 있어왔던 승군은 호국불교의 한 모습으로 규정되어왔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승군은 도첩제하에서 승려들을 환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를 지닌 탄압의 한 도구였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효와 불충을 저지르는 승려들에 의해 나라 지키기가 행해졌던 것이다.

승군으로 동원된 승려들에게는 무엇보다 식량 문제가 가장 컸다. 통정대부(通政大夫)니 가선대부(嘉善大夫)니 하는 명예직에 불과한 벼슬을 주면서 벼슬자리 값으로 곡물을 내도록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직책과 곡식을 맞바꾸어 승군의 양식을 승려가 스스로 마련하게 한 것일 뿐, 어디까지나 한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승군의 식량 문제는 이후부터 커다란 병폐로 악화될 수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연좌를 입혀라
그래서 굶고 헐벗은 승려가 도망하는 일이 늘어나자 정부는 승군제도를 번전으로 재정립한다. 그러나 “사찰의 토지와 불기(佛器)까지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되자, “세속에 사는 부모에게 물리는가 하면 고향 마을에까지 그 폐혜가 끼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논요승보우소>
성리학의 대표적 인물인 이율곡은 1565년 <논요승보우소>를 올렸는데, 단 한 명의 승려를 처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읽어보면 왜 죽이라는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고 그저 “설사 보우가 털끝만 한 죄도 없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처단해야 한다는 요지만 밝히고 있을 뿐이다. 유생들은 보우를 처단하라는 계와 상소를 단 6개월 동안 각각 75건과 423건을 냈다.

③공사(公私) 동원
-밑천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떼워라
농사를 지어야 할 백성이 도적이 되거나 산으로 숨어들어 승려가 되어버리자 그들을 유인해내고 승려의 수를 줄이기 위해 호패나 도첩을 구실로 승려를 공사에 동원한다.

대표적인 공사로 중종 대에 있었던 견항나루 공사. 당시 동지사 권예는 임금에게 공사에 필요한 도구조차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충분한 양식을 마련하지 못한 형편이라 날짜를 따지며 공사를 빨리 끝내려 하고 있으므로 공사를 독촉하지 않아도 제각기 힘을 다해 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라고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무엇보다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면 공양하는 것처럼 보일까하여 그만두었다는 승정원의 보고도 있다.

그리고 107편의 상소
“조선왕조는 왜 그토록 불교와 승려, 사찰과 제도들을 멸망시키려고 했을까? 조선왕조의 극단적인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도 왜 승려들은 그렇게 불교에 귀의하려 했을까? 조선시대 성리학(유학)이 오늘날 한국인에게 남긴 가치와 교훈은 또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지독한 탄압 속을 걸어온 한국 불교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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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까지 폐허로 남아있던 석굴암인데.... 그걸 일제가 복원한거. 당시에는 최신식 기술이라는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복원한 부분도 있었고... 역사란 재미있지. 근데, 한국인들은 상당수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에, 왜곡되고 허무맹랑한 얘기에도 선동이 잘 됨.

ㄴ 덧붙여 말하면, 우리가 잘 아는 석굴암과 불국사 같은곳이 19세기말, 20세기초까지도 폐허로 남아 있었음. 우리가 지금 보고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 아님. 유교사회인 조선이 500년을 이어져 오는 동안, 불교는 배척당하고 쩌리 취급을 받았거든... 그걸 일제가 다 복원시켜준거고. 좋든 싫든 그게 사실임. 그 당시에는 콘크리트라는 최신식 기술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걸 일제가 콘크리트로 훼손시켰다고 광분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그런 말을 하기에는 좀 아이러니한 면이 있긴 하지.

ㄴ 그런적 없습니다. 석굴암과 불국사가 붕괴직전의 상황까지 간 것은 이미 사진으로도 남아 있구요. 20세기초까지도 폐허로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일제의 복원이 미흡한점이 많았겠지만,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그게 최상이었죠. 수준 높은 한국의 석굴암이나 불국사를 일제가 의도적으로 망가트렸느니, 시멘트로 일부러 파괴시켰다느니 그런 말을 언론에서도 많이 했는데, 그건 전부 허위 사실이고 선동이죠.... 사실 한국이 우리의 유적이나 문화재를 보존하고 아낀건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ㄴ대한제국 초기 석굴암.불국사 검색해서 봐라. 어떤가그냥 방치 수준이다. 거짓하나 없이 얘기한다면 버려진 폐가 수준임. 근데 일본이 당시 최신공법인 콘크리트로 살렸지. 이걸 전교조 교사들은 일본이 우리 문화재 버려놨다고 선동만 하지 석굴암.불국사가 폐허로 버려졌었단 얘긴안함. 그리고 일본은 지금도 문화재 보수때 콘크리트 많이씀.

석굴암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은 그냥 일본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키워준거나 다름 없습니다. 한국이 키운 산업들 다 일본한테 기술 배우거나 훔쳐왔고(그중 몇몇은 스승인 일본을 뛰어넘기도..) 각종 행정체계 사법체계 교육체계 싹다 일본 벤치마킹입니다. 학술용어 법률용어 죄다 일본이 만든 거 쓰고...해방 후 아무것도 없던 형편없는 나라였으니 벤치마킹과 패스트 팔로워 전략은 어쩔 수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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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사찰인 익산 미륵사를 파괴한건 신라가 아니라 조선왕조다. 신라의 감은사 등 수많은 신라 사찰도 조선에 의해 파괴 되었다 불국사도 원래 호수로 돼있어 배를 타고 다녀야 했는데 조선이 다 메워버리고 불국사도 폐허가 된 것을 일본으로부터 독립후 조선건축양식으로 희안하게 복구한것임, 고려때까지 사찰들이 일본과 양식이 같았는데 조선때 중건이라는 이름으로 다 조선양식으로 강제 중건됨

조선이 세워진지 200년만에 일어난 임진왜란때 경복궁을 불태운것은 일본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폭정에 분노한 조선백성들이 조선왕조가 피난간 틈을 타 불태운것이다

백제의 예술성이 김씨 신라보다 뛰어나다고 헛소리하는 인간들 많은데(가야는 미개해서 유물조차없고-가야와 백제의 멸망시점은 100년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박씨 신라는 백제보다 미개한거 맞음-신라의 미소 수막새가 박씨 신라 때꺼임) 국보인 백제 서산마애불 과 국보인 김씨 신라 기마상&미륵반가사유불상 비교해보면 김씨 신라가 백제보다 차라리 나음 그리고 고려시대 국보들을 보면 백제보다 발전했음, 유교조선이 퇴보해서 그렇지

옷과 건축양식이 백제~고려까지 같다가 유교조선때 바꼈는데 신라에 덤탱이 씌우고 있음

고려의 삼족오를 불태우고 만든 조선을 상징하는 태극도 유교에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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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역사내내 유교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도쿠가와 막부가 유교를 받아들였는데 때문에 조선처럼 미개해져서 페리 제독 사태를 맞이함.

결국 이 일로 세키가하라 전투때 도쿠가와 연합군에 박살났던 도요토미 연합 가문들이 천황을 앞세워 도쿠가와 막부에 대적해서 일어난 전쟁이 보신전쟁인데 이때 일본을 갉아먹는 유교를 박살내자는 것도 모토로 있었음. 이때 천황파가 도쿠가와 막부를 멸해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거임.
그런데 유교기독극우조선kbs(개백수)는 유교가 메이지 유신을 일으켰다는 희안한 논리를 펴고 있음.

일본가봐라 서원, 향교가 1개라도 있는지.

대만도 노신(루쉰) 사상으로 유교를 폐했는데 반도짱개 조선것들이 짱개도 아닌 대만사람들을 섬짱개라 욕하는 거 보면 구토나옴.

베트남도 유교국가라 복식이 미개함. 아오자이는 유교베트남 전통복식이 아니라 제국프랑스가 개발해 식민지 베트남 신민들에게 입힌것. 몽고 전통복식도 유교가 강한 원나라 쿠빌라이때 만들어진것

불교국가인 티벳의 포탈라궁을 봐라 미개한 조선궁궐과 급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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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고려는 절대 가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의 과학기술과 경제력이 조선초 잠깐 번영의 근간이 되었다. 오죽하면 조선왕 선조도 "전조는 부유했는데 우리 조선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라며 한탄할 정도였다. 조선이 고려시대 역사서를 모두 불태우고 지들입맛대로 새로 쓴게 고려사다. 그것을 한탄한 고려말 조선초 학자 원천석이 몰래 실제 역사를 남긴 게 운곡시사인데 조선시대에 원천석의 후손들이 가문이 조선왕가에게 멸족될 것을 우려하여 다 불태웠다고 함

요동정벌 때 절대 곡식이 부족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곳간을 불태운 것은 이성계였다.

세종의 탄식: "물력의 풍부함은 조선이 미치지 못한다"
​조선 초기, 기틀을 다지던 세종대왕 역시 즉위 초반인 **세종 4년(1422년)**에 고려의 어마어마한 석물(돌로 만든 조각이나 건축물) 규모를 보고 감탄하며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생각해 보면 고려가 나라를 세운 이래로 물력(物力)의 풍부함은 우리 조선이 거의 미치지 못할 바이다.
석물을 세운 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바다를 보고 나면 다른 물은 시시해 보인다'더니, (고려 태조의 황릉이었던) 정릉의 석물을 보고 나니 길가의 소소한 석물들을 마주칠 때마다 저게 무슨 애들 장난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7월 9일 갑자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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